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문단 편집) == 종합 == 참사의 원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빙산 경고 메시지가 선장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항로를 바꾸지 못했다. * 쌍안경함 열쇠를 항구에 두고 왔고, 탐조등도 없었던 데다가 하필 그날 또 하늘에 구름이 끼어 있어서 달빛도 없었다.[* 애초에 구름이 없었다 쳐도 [[삭|달이 완전히 기울은 무렵]]이었다. [[음력]]으로는 [[1912년]] [[2월 27일]]이기 때문.] 때문에 [[견시]]들이 맨눈으로 식별하기 매우 어려웠고, 야밤인데 불로 앞길을 밝히지를 못하니 쌍안경도 소용없었을 가능성이 컸다. * 게다가 배는 당시 전속력 항행중이었으며, 파도까지 잔잔해서 빙산이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 사실 어찌저찌 위의 조건들이 없어서 일찍 빙산이 발견됐다고 가정하더라도, 빙산은 [[빙산의 일각|대부분이 바다 밑에 있기 때문에]] 알아냈을 때는 늦었다. * 선체를 당대 최고 품질의 강철로 만들었지만 생산 당시 상정하지 않은 낮은 수온에 노출되어 내구성이 악화되었다. 리벳 또한 불량이었다. * 그나마 가장 가까웠던 배인 캘리포니안호의 유일한 통신사는 타이타닉호의 통신사에게 일침을 들은 후 초과 근무로 피곤해서 침몰 당시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다른 작품에서는 타이타닉호가 육안으로 인식될 정도여서 견시병들이나 갑판에서 구조신호를 목격했고 나중에는 통신까지 되었으나 타이타닉호처럼 큰 배가 침몰한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위에 나온 RMS 카르피아호를 제외한 모든 배가 그런 반응이었다고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중에 가서는 선박들이 패닉하여 무선이 너무 많아지고, 결국 재밍까지 일어날 정도로 모든 배들이 대충 저게 뭔 사태인지 정도는 인식하고 있었고, 프랑크푸르트호, 발틱호, 버지니안 호 등 일부 구조에 나선 선박도 많이 있었으며, 이 중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생존자들이 저체온증에 걸려있을 것을 염려하여 담요를 준비하고 빵을 조리하도록 명령한 기록이 있다. 아마 다른 선박들도 비슷했을 것이다.] * 선원들과 승객들 사이에 대피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선장과 상선사관들도 난생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혼란을 겪었다. 1958년 타이타닉호의 비극에서 간략하게 묘사된다.[* 비상시 대응방법 숙지를 강제하기 위해 일부 국가에서는 이런 큰 유람선이나 여객선은 출항 시각이 임박해 오면 의무실 같은 곳만 빼고 모든 시설의 문을 닫고, 훈련이 다 끝나고 나야 비로소 다시 이용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 마찬가지로 대피 훈련이 없었던 탓에 배 밑에 위치한 3등실 승객들과 선원들이 복잡했던 선내 구조와 혼란한 상황 속에 탈출하는데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일단 나중에는 대부분 어떻게든 나오긴 했지만 이미 상당수의 구명정이 떠난 상태였다. * 구명정의 정원이 탑승객들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합법적이었는데, 당시 영국법이 구명정을 사람 수가 아니라 톤 수에 맞추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당 법은 사고 이후에야 개정되었다. * 그럼에도 많은 구명정이 꽉 차지 않은 상태로 출발해 버렸다. 20척 모두 알맞게 채웠으면 절반인 1100명이 넘게, 또한 정원은 이보다 더 타면 바로 배가 가라앉아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안전을 고려해 여유를 두고 정하는 수이므로 가능한 한 조밀하게 탑승시켰다면 1,500명쯤은 살릴 수도 있었다. 즉 가장 이상적인 구조활동이 진행됐다면 생존자 수와 사망자 수가 서로 반대로 나와야 했다. 그야말로 악조건의 연속이자 [[총체적 난국]]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